경인선(京仁線)은 서울특별시 구로구의 구로역과 인천광역시 중구의 인천역을 잇는 총 연장 27km의 대한민국의 철도 노선이다. 대한민국에서 공식적인 기록상 최초의 철도로 1897년 3월 22일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기공하여 1899년 9월 18일에 일부 구간이 개통되었다. 1974년 8월 15일부터 전 구간을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운행하고 있다.

경인선
Korail Gyeongin Line.png
경인선의 위치
141 Guro Gyeongin Line 0 km.jpg
구로역 경인선 0 km 거리 표지
기본 정보
운행 국가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종류광역 철도
상태영업 중
기점구로역
(서울특별시 구로구)
종점인천역
(인천광역시 중구)
역 수21
개통일최초 개통: 1899년 9월 18일
수도권 전철 1호선 운행 개시: 1974년 8월 15일
소유자국가철도공단
운영자한국철도공사
서울교통공사[내용주 1]
노선 제원
영업 거리27.0 km
궤간1,435 mm
선로 수4(구로 - 동인천)
2(동인천 - 인천)
전철화가공전차선
교류 25,000V
신호 방식ATS
노선도

0.0
141 구로
1.4
142 구일
2.4
143 개봉
3.7
144 오류동
5.6
145 온수 Seoul Metro Line 7.svg
6.9
146 역곡
8.4
147 소사 서해선
9.5
148 부천
←구김포선 (김포역 방면)
11.2
149 중동
12.2
150 송내
13.4
151 부개
14.9
152 부평 인천 1호선
16.6
153 백운
18.1
154 동암
19.3
155 간석
20.5
156 주안 인천 2호선
21.5
157 도화
주인선
22.5
158 제물포
23.9
159 도원
25.1
160 동인천[내용주 2]
27.0
161 인천 수인분당선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운행계통
1 : 경인선 특급
2 : 용산 - 동인천 급행
3 : 인천 - 동두천/소요산 경인-경원계통 완행
인천 - 동두천 경원선 급행[내용주 3]
4 : 경부선 계통

약 290만명이 사는 인천광역시와 약 80만명이 사는 부천시, 그리고 950만명이 사는 서울특별시를 연결하며, 연선의 교통량 절반 이상을 분담하고 있다.출퇴근 시간에 타보면 진짜 미어터진다. 경원선 용산역 ~ 광운대역 구간과 함께 도시철도화되고 있는 노선이기도 하다.

역사편집

착공과 개통편집

착공이전

조선은 뒤늦게 철도 건설의 필요성을 깨달았지만, 당시 재정이 빈궁하여 독자적으로 철도를 부설할 만한 능력이 부족하였다. 수도 서울은 수백년 간 한강을 통한 수운으로 물자를 수송하였으나, 개화와 산업발전을 위해 서울을 항구와 직접 연결해주는 새로운 대량수송 수단이 필요하였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제물포가 1883년에 개항되면서 서울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 철도가 구상되었다. 한편 경인선 철도 부설에 관심이 있던 미국 정부는 1883년 6월 23일 독변교섭통상사무 민영목을 통해서 제물포와 한강의 수심 측량을 허가받고, 1887년 2월 9일에는 뉴욕 조선영사 프레이저(E. Frazar)를 통해 김윤식에게 '전등 및 철도 신설계획의 요청' 공문을 보냈다.

이후 1891년 3월 고종은 이완용과 이하영을 시켜 주한미국전권공사인 기업가 제임스 모스(James R. Morse)와 '철도창설조약'을 협상하였고, 모스는 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을 통해 지속적으로 경인선 부설권을 획득하려 하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철도 부설권을 얻고자 1894년 8월 무단으로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하였고, 이는 조선 정부가 재정적 여유가 없으므로 일본 정부에서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를 부설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청일 전쟁 직후의 삼국간섭으로 한국에서 철도의 주요 이권을 독점하려는 일본의 영향력은 약화되었고, 1896년 아관파천 50일 만인 3월 29일 철도부설권은 모스에게 넘어갔다. 이는 철도에 대한 최초의 특허권 부여이며 미국이 조선정부로부터 최초로 이권을 양도받은 사건이기도 하다.

착공 이후

한국정부가 모스와 체결한 '경인철도특허조관'에는 특허일로부터 12개월 내에 공사를 시작하여 그 후 3년 안에 준공하며, 이를 위반할 시 특허의 효력이 상실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모스는 1897년 3월 22일 오전 9시 경인가도상의 우각현(牛角峴, 지금의 도원역 부근)에서 기공식과 함께 공사를 시작하였다. 일본은 부설권을 재취득하기 위하여 조선이 정치적으로 어지럽다는 거짓 소문을 미국에 흘렸고, 이로 인해 미국 투자가들이 자금을 회수하며 모스는 자금난을 겪게 되었다. 여기에 기술적인 난제까지 겹쳐 공사는 중단되었고, 1898년 5월 10일 공사 중인 경인철도가 170만 2452원 75전 (당시 1백만 달러)에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양도되기에 이르렀다. 경인철도 부설권 인수에는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중심인물로 참여하였다.

1899년 9월 18일 인천역 ~ 노량진역 간 33킬로미터 구간이 개통되었고, 인천역에서 기념 행사가 열렸다.[1][2] 당시 개통된 역은 인천 - 축현 - 우각동 - 부평 - 소사[내용주 4] - 오류동 - 노량진의 7개 역이었다.[내용주 5] 1900년 7월 8일에는 노선이 노량진역에서 경성역까지 연장되었으며[3], 같은 해 11월 12일 경성역에서 경인철도 완전 개통식이 진행되었다.[4] 1906년 2월 10일에는 우각동역이 폐지되었다.[5]

급하게 부설한 선로였기 때문에 곡선반경이 작고 교량 등 구조물이 부실하여, 1907년부터 2년 간 52.5만엔(당시)을 들여 개량 공사를 진행하였다.[6][7] 1909년 3월에 이 공사가 완료되면서 경인선의 연장이 1.6 km 감소했으며 철도용지와 교각 등이 복선 규격으로 마련되었다.[8][6] 또한 이 공사에 따라 당시 축현역이 이설된 시기는 1908년 12월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노량진역에서 한강철교 쪽으로 가다 보면 '한국철도 시발지비'가 있는데, 이 비는 1999년에 제작된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 스탬프 가운데 노량진역 스탬프에 새겨져 있다. 도원역 부근에도 경인선 기공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편집

개화기 경인선은 명목상 사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국유철도나 다름없었다. 한일합방조약 즉, 국치일 이후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설치되고 경인선은 정식으로 일본의 국유철도가 되었다. 1904년 경부선 개통으로 경인선은 실질적으로 경부선 지선이 되었지만 조선 수위도시 서울과 외항 인천을 연결하는 노선으로써 그 당시부터 수송량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일제는 1928년에 복선화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 부족으로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또한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복선화는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술할 광복 이후 60년대 들어서야 복선화에 착수하게 된다.

광복이후와 수도권전철 개업편집

1945년 광복으로 일제가 한반도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경인선은 해방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운영을 보였으며, 미군정에 의해 운영되다가 대한민국 철도청이 출범하면서 철도청이 경인선을 관할했다. 6.25 전쟁으로 경인선도 조선인민군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한국 정부는 일제가 이루지 못한 경인선 복선화에 착수하였고 부족한 재정 상황에서도 1963년 11월에 착공해서 1965년 9월 18일 구로 - 인천 구간이 복선화되었다[9]. 이로써 경인선은 대한민국의 철도 중 경부선에 이어 두 번째로 복선화가 완료된 노선이자, 대한민국 정부가 최초로 복선화시킨 노선이 되었다. 이 시기 증기기관차 견인의 객차 편성을 대신하여 일본에서 니가타 디젤동차를 도입하여 운행시간 단축과 무연화를 달성하기도 하였다.

1974년 8월 15일 전구간이 전철화되어 경원선 성북역(현 광운대역)과 인천역 사이를 통근형 전동차가 운행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로 인해 일반 열차의 운행은 중지되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을 통해 서울의 도심으로 바로 진입하기 때문에 서울 - 인천 간 교통에 큰 기여를 하였다. 1994년에는 구로역 이후에서 빚어지는 경부선 서울 ~ 수원 구간과의 병목현상 해소를 위한 용산 ~ 구로 2복선화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후 복선만으로는 많은 교통량을 모두 처리할 수 없게 되자 선로용량을 확대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90년대에 들어 복복선화 사업이 착수되었다. 구로역 - 부평 구간은 1991년 11월에, 부평 - 인천 구간은 1996년 9월에 각각 착공되었다. 구로 - 부평 구간은 1999년 1월에, 부평 - 주안 구간은 2002년 3월에, 주안 - 동인천 구간은 2005년 12월에 각각 개통되었다.

열차운행 변천편집

1899년 개업 직후편집

1899년 9월 18일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모가형 증기 기관차[내용주 6]가 운행되어 1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개통 직후 인천역노량진역을 오가는 열차 시각표는 다음과 같았다.[10]

역명 로마자 역명[11] 한자 역명 열차 시각 비고
인천 Incheon 仁川 0 0 7:00 10:40 13:00 16:40 인천
동인천 Dongincheon 杻峴 2 2 7:06 10:35 13:06 16:35 동인천역
부평 Pupyeong 富平 6 9 7:36 10:05 13:36 16:05 부평역
부천 Bucheon 素砂 3 12 7:50 9:51 13:50 15:51 부천역
노량진 Noryangjin 鷺梁津 7 23 8:40 9:00 14:40 15:00 노량진역

또한 개통과 함께 한국 최초의 철도운송약관인 '경인간철도규칙'이 농상공부령으로 발령되었다. 이는 다음과 같았다.[12]

제1조 철도에 운전하는 화륜거를 타는 자는 어떤 사람이든지 먼저 표값을 내고 차표를 사서 차를 타고 차에서 내린 후에는 차표를 차주에게 내어라.
제2조 어떤 사람이든지 표값을 내지 않고 차를 타거나 자기가 가진 등급보다 고등급 차에 타고 가는 자는 그 차표에 정한 외에 찻값을 리수 원근과 등급의 어떠한 것을 물론하고 한사람에 5전씩 받는다.
제3조 돌림병을 앓은 사람은 승차를 거절한다.
제4조 미치거나 난잡한 자는 승차를 거절한다.
제5조 어떤 사람이든지 정거장과 철도소 안에 있는 각종 표지와 기계, 짐, 목침목, 담을 파손하는 자는 회사에게 적당한 배상을 해야한다.
제6조 차타는 사람의 손에 든 물건은 따로 운임을 받지 아니하며 차안에서 물건이 상하거나 차표를 잃어버리더라도 회사에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제7조 귀중품이나 금, 은, 그릇, 각종 표문건, 어음, 지전, 구슬, 금덩이, 모피, 상등의복, 단필, 서화 등 귀한 물건은 운송하는 비용이나 보험료를 내지 않으면 회사에서는 그 손해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
제8조 소와 말과 산짐승을 수송하는데 보험료를 내지 않으면 그 손해에 대해서 회사는 책임이 없고 만일 보험료를 낸 자라도 배상하는 돈은 말은 한 마리에 10원 안이요. 소는 한 마리에 20원 안이요. 다른 동물은 한 마리에 3원 안으로 정한다.
제9조 위험한 물건이라는 것은 화약, 폭발물, 동물과 생석회이며 석유, 초, 성냥 등 불이 나면 다른 물건을 해치는 물건은 위험물로 취급한다.
제10조 잃어버리거나 상한 물건에 대한 손해배상은 회사가 재물을 거둔 후에 혹 관리하는 동안에 회사에서 게을리 하였을 때는 배상하나 재물주인이 소홀히 하였을 때는 회사에서 책임이 없다.
제11조 물건을 철도에 부칠 때 운임을 내며 특별히 후에 내기로 약조한 정거장에 당도하여 운임을 받고 물건과 교환한다.
제12조 철도소 안에 두는 물건과 차에 실은 물건의 잃은 것과 상한 것은 물건주인의 책임이요, 철도는 화물을 차에 실은 후 내리기까지만 보호한다.
제13조 차안에 틈이 없고 차가 부족한 때에는 차객과 화물을 거절한다.
제14조 회사에서 정하는 근은 영국 근이니 곧 파운드라 하고 자는 영국 척이니 12이요, 리는 영국 리이니 백 링크(wikipedia판)(百輪)를 일 체인(一鎖)이라 하고 80체인을 리라 하며 톤은 영국근수로 2천2백40근이요, 용적은 백 입방 영척으로 한다.
제15조 차객과 화물의 임자는 이상의 조목을 굳게 지키되 만일 이 규칙을 준행치 않는 자는 차타며 화물운송허가를 얻지 못한다.

— 농상공부, 경인간 쳘도 규칙, https://nl.go.kr/newspaper/detail.do?id=CNTS-00098979894


이후 몇 차례의 시각표 개정이 있었으며 1903년 7월 1일에는 경인선 최초의 급행열차가 신설되었다.[13] 당시 하루에 인천발 7회, 경성발 7회가 운행되었는데, 그 중 인천발 막차인 오후 9시발 열차가 축현역, 소사역, 영등포역, 남대문역, 경성역에만 정차하게 된 것이다.[14][15] 이후 광복을 거쳐 수도권전철 개업이전까지는 1965년 복선화와 일본에서 도입한 디젤동차의 운행 개시에 따른 소요시간 단축 외에 별다른 변화없이 계속 이어졌다.

1974년 수도권전철 개업 이후편집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서울역에서 지하철 청량리역까지 건설된 서울 지하철 1호선[내용주 7]과 연계되어 통근형 전동차가 운행되기 시작하였다[16]. 수도권 전철 개통 이후로는 일부 특별 열차를 제외하고는 KTX, 새마을호, 무궁화호 등의 일반 열차는 운행하지 않는다. 현재 수도권 전철 체계 안에서 서울 서남부와 부천시, 인천광역시를 서울 중심부와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후 1980년 철도청 소속 운행 편성의 8량화를 시작으로 80년대 후반 10량 편성화[내용주 8]가 개시되었으나 이후에도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여 복선만으로는 수요를 모두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1999년 구로-부평, 2002년 부평-주안, 2005년 주안-동인천 구간이 2복선화되었다. 2002년 OD 조사에서 인천광역시·부천시·서울특별시 사이의 철도통행량은 511451로 조사되었는데[17], 2복선화 작업을 하지 않았을 경우 처리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2복선 개통으로 가운데 내선에는 급행을 운행시키고 있는데, 이 급행은 동인천역용산역에서 발착하며, 경인선에서는 제물포·주안·동암·부평·송내·부천·역곡·개봉역에 정차하고,[내용주 9] 경부선과 합류하는 구로역부터 용산역까지는 모든 역에서 정차한다.[내용주 10]

현재 용산역 3번 승강장과 동인천역 2번 승강장에서 출발하며 원래는 동인천역 대신에 주안역까지였으나, 동인천역까지 급행을 연장하여 현재는 용산~동인천 구간을 왕복하고 있다. 열차 외부 행선안내기에는 동인천 급행, 용산 급행, 동인천 특급, 용산 특급으로 표시된다.[내용주 11]

논란편집

2복선화 이후의 선로운용 관련 논란편집

경인선은 2복선화 당시 급행선 역할을 하는 내선을 용산에서 선로가 끊기는 경부 2선으로 연결되도록 하였으며, 완행이 다니는 외선의 경우 경원선 소요산역까지 연계되는 경부 3선으로 연결되도록 하였다[내용주 12][내용주 13]. 참고로 경부 2선의 경우 여러 사정상 서울역 등으로 연장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내용주 14]. 이로 인해 장거리를 담당해야할 급행은 용산까지 끊기게 되었으며, 정작 단거리를 담당하는 완행의 경우에는 심하면 소요산역까지 가기도 한다. 이는 급행은 커녕 광역철도 개념도 제대로 되어있었지 않았던 80년대 ~ 90년대 당국의 병크이다[내용주 15].

철도 동호인 계열과 인천광역시 등 연선을 중심으로 현행 경인2복선의 용산에서 끊기는 선로와 연계되는 내선 급행, 서울 지하철 1호선 등과 연계되어 청량리, 소요산 등지까지 갈 수 있는 현행 체계가 시작부터 잘못된 결정이며 외선의 선형 문제를 감수해서라도 다음과 같은 내선 완행, 외선 급행 체계로의 변경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18] 물론 2복선에서의 내선을 속달열차가 쓰는 건 선형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수도권과 상황이 얼추 비슷한 일본의 기관차 견인 일반열차 95km/h, 전동차가 110km/h이라면 외선의 선형이 안좋아도 큰 문제는 없으나 당장 기관차 견인 일반열차가 120km/h로 내달리는건 상당한 차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경인선은 부정기 관광열차를 제외하면 일반열차가 드물게 운행되는데다 노선 성격상 외선의 선형이 그렇게 중요하냐는 반론도 있다. 선형이 생명인 경부선도 서울-수원 2복선 개통때 과거 수원역 북단 전철선과 열차선이 평면교차하는 지장요소를 남긴 사례도 있는데다 최근 누리로 등 전동차로도 기관차 견인 열차 수준의 승차감을 충족하고 있어 철도동호인 계통 한정으로 이 논란은 재조명되고 있다. 이러한 지장요소를 감수해서라도 급행 열차를 외선으로 다니게 하자는 주장은 다음과 같다.

  • 배선관계상 막차 혹은 이른아침 첫차시간대 오류동, 부평 등등 중간거점에서의 시종착 열차 설정이 불가능하여 나머지 역들은 첫차와 막차 이용이 불리함.
  • 열차운행의 기본 원칙인 급행이 장거리, 완행이 단거리를 담당하는 즉, 급행과 완행의 역할분담 왜곡.
  • 오류동역의 철도청시절부터 유서깊은 화물거점인 서울장비사업소와 중앙보급사무소의 유치선 출도착과 입환, 3군 지사선의 분기로 인한 본선 지장 가능성을 검토하지 않은 채 실질적으로 화물열차가 운행하는 급행선을 내선으로 한 결과 당초 취지였던 선로용량 증설 효과마저 저해[내용주 16].

실제로 공론화되지는 않았고 언론의 보도로 이어지지도 않았지만 한국철도공사 등 관계기관 내부 차원에서의 검토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18].

이를 위해서는 아예 다이어를 바꿔 완행을 용산종착으로 개편하고 급행을 1호선 직결 계통의 소요산 급행으로 개선하는 방법이 있다. 사실 급행은 내선, 완행은 외선인게 딱히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2복선을 할때 내선을 청량리가는 선로로 연결하고 외선을 용산가는 선로로 이었으면 될 일이다. 실제로 외선으로 연결되는 쪽이 급행 운영에는 적합한데 현행 한강철교의 급행선로는 삼각선이랑 평면교차 문제도 있고 한강철교 자체 또한 급행선로가 더 선형이 좋지 않다[내용주 17][내용주 18]. 즉, 진작에 2복선화를 했을때 내선을 서울역으로 가는 선로를 잇고 반대로 외선을 현행 급행선인 용산에서 끝나는 선로로 이으면 되지만, 90년대에는 광역철도 개념이 더더욱 없었고 급행에 대한 개념도 없었을때라...[내용주 15]

하지만 현행 다이아그램(열차시각표) 그대로 적용할 경우 경인선 부천 이북 특히 서울시계 내에 있는 완행 정차역들의 열차 이용, 온수나 소사 등 환승역 이용이 불편해지며 결정적으로 완행의 경우 장점인 서울지하철 1호선(종로선)으로의 직통이 불가능한 문제가 남는다. 거기에 현행 경인선의 경우 아침저녁 첨두시(러시아워, RH)에는 완급비율이 거의 1:1, 비첨두시(NH)에는 완급비율이 2:1 즉, 완행이 많고 급행이 적은 상황인데 이 상황에서 2복선의 내선과 외선의 역할을 맞바꿀 경우 반대로 완행 정차역의 열차이용이 나빠지게될 가능성도 있다[18].

전술한 대안의 핵심인 서울지하철 1호선(종로선) 직결 계통의 급행화도 열차 운행 장해 발생시의 파급력, 이미 만성화된 1호선 계통의 지연 운행 문제로 효과가 그리 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반론도 있다. 더군다나 급행의 출발역도 다른데다 구로 이북에서 부터 급행과 완행계통의 선로가 다른, 즉 노선만 같을 뿐 운전계통이 달라서 실질적으로는 다른 노선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견해마저 있다[내용주 19][내용주 20]. 이 문제에 대한 또 다른 대안으로 용산에서 종착하는 급행을 지상서울역까지 연장하는 방안마저도 용산 이북의 선로배치 등등의 문제로 쉽지 않는 상황.

지하화 논란편집

이른바 경인 익스프레스.

현재 경인선 인근은 거의 개발이 된 상태인데 그 사이에 넓은 2복선 선로의 노반이 떡하니 차지하고 있으니 단절 문제가 심각하다. 당장 부평역, 부천역에서 보듯 남부 역세권과 북부 역세권이 괴리된 케이스를 경인선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경인선 인근에 대대적인 도시재생사업과 단절된 도로 연결 사업을 시행하지 않는 이상 지속적으로 요구되고 있으며 매번 선거철마다 등장하는 공약 떡밥이다. 하지만 엄청난 사업비가 소요되고 공사 기간 중 열차 운행 중단 등의 문제로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으며 실현 가능성은 여전히 낮은 상황이다.

거기다 애초에 국유철도라는게 다 그렇듯 선로부지가 다 국유지라 그나마 사업비를 회수할 가능성이 있는 부지매각마저도 철도부지를 일반재산화하는 조건이 붙는 등 법적으로도 불가능한 상황이라 사업비 측면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19]. 국비투입마저도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라 민자유치 방안도 검토되지만 역린이나 다름 없는 철도민영화 논란으로 이어지기 쉬운 조건이라 여러모로 난항에 가까운 상황이다.

또 다른 문제는 운행하는 열차의 종류에 따른 안전문제인데 여객열차가 운행되고 있고 선로 수가 훨씬 많은 경부선에 비해서는 실현 가능성이 높은 편이지만 걸림돌은 여전하다. 당장 화물열차 운행도 송도의 인천신항 개항으로 수인선, 인천신항선으로 분산될 가능성은 있지만 그 대안인 수인선마저 수원역 인근이 지하화의 압력에 굴복하는 바람에 불가능해진 상황이고, 전술한 오류동역의 화물 거점... 즉, 화물열차 운행이 줄어들지언정 전폐될 일은 없는게 현주소이다[내용주 21][내용주 22]. 거기에 부정기로 운행하는 관광열차 등 일반열차 운행이 없지는 않는 점도 클리어해야 할 문제이다.

거기다 제2경인선 계획까지 거론되다보니 일단 중요한 핵심가운데 하나인 지하화 규모마저도 갈피를 못잡는 우여곡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다보니 철도동호인 계열을 중심으로 차라리 소음문제 해결은 불가능할지언정 지역 단절만큼은 확실히 해결할 수 있는 연속고가화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당장 일본만 해도 JR 소부본선의 도쿄도, 치바현 일부 구간의 고가화 등 간선철도를 고가화한 사례[내용주 23]가 많을 뿐더러 지하화된 경우는 지형적 여건 등에 따라 예외적인 경우가 많다.

역 목록편집

  • 부기역명(사용료를 받고 한시적인 기간동안 걸어두는 역명)의 영문과 한자는 표기하지 않았다.
  • 굵은 글씨수도권 전철 1호선 개업 이전부터 존재했던 역이다.
역 번호 역명 로마자 역명 한자 역명 특급 급행 접속 노선 역간
거리
영업
거리
소재지
경부선 신도림 방면
141 구로 Guro 九老 수도권 전철 1호선(광명·서동탄·천안·신창 방면) 0.0 0.0 서울특별시 구로구
142 구일
(동양미래대학)
Guil 九一 1.4 1.4
143 개봉
(한영신대)
Gaebong 開峯 1.0 2.4
144 오류동 Oryu-dong 梧柳洞 1.3 3.7
145 온수
(성공회대입구)
Onsu 溫水 서울 지하철 7호선 1.9 5.6
146 역곡
(가톨릭대)
Yeokgok 驛谷 1.3 6.9 경기도 부천시
147 소사
(서울신대)
Sosa 素砂 수도권 전철 서해선 1.5 8.4
148 부천
(부천대학교)
Bucheon 富川 1.1 9.5
149 중동 Jung-dong 中洞 1.7 11.2
150 송내 Songnae 松內 1.0 12.2
151 부개 Bugae 富開 1.2 13.4 인천광역시 부평구
152 부평
(가톨릭대인천성모병원)
Bupyeong 富平 인천 도시철도 1호선 1.5 14.9
153 백운 Baegun 白雲 1.7 16.6
154 동암 Dongam 銅岩 1.5 18.1
155 간석 Ganseok 間石 1.2 19.3 남동구
156 주안 Juan 朱安 인천 도시철도 2호선 1.2 20.5 미추홀구
157 도화 Dohwa 道禾 1.0 21.5
158 제물포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Jemulpo
濟物浦 1.0 22.5
159 도원 Dowon 桃源 1.4 23.9 동구
160 동인천 Dongincheon 東仁川 1.2 25.1 중구
161 인천
Incheon 仁川 미운행 수인선( 수인분당선) 1.9 27.0

각주편집

내용주
  1. 열차만 운행
  2. 경인선 특급 및 동인천 급행은 본 역에서 종착
  3. 인천 - 광운대 구간 전역정차
  4. 현재는 부천역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현재의 소사역과는 별개이다.
  5. 현재는 구로역에서 인천역까지를 경인선이라고 하며, 구로역 이북은 경부선에 편입되었다.
  6. 미국 브룩스 사(Brooks Locomotive Works)에서 부품단위로 제작되었고 인천공장에서 최종 조립된 탱크 기관차였다.
  7. 당시에는 종로선이라고 불렸다. 오히려 건설주체인 서울특별시에서만 건설행정상의 이유로 고속전기궤도 1호선으로 호칭했고 대외홍보나 지하철 운영상의 안내에서는 종로선으로 불렸던... 즉, 일본처럼 국유철도와 동일하게 노선명 원칙이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8. 지금과는 달리 2005년 다이어그램 개정 이전까지 서울지하철 전동차는 경인선에서 소수의 청량리-주안 반복다이어 외에는 볼 수 없었고 경부선에서 서울지하철 전동차를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이 있다.
  9. 평일 출근 시간대 2회 상행 한정 동암역과, 송내역, 역곡역을 통과하는 열차가 운행한 적이 있었고, 2017년 7월 7일부터 상·하행 9회 제물포역동암역, 역곡역, 개봉역을 통과하여 특별급행으로 운행한다.
  10. 단, 특별급행은 신길역대방역을 통과한다.
  11. 운행 초기에는 직통열차라는 명칭이 사용되어 열차 외부의 행선 안내기에 부평역직통, 용산역직통 등으로 표시되었고 복복선이 주안까지 연장되면서 주안행에 한하여 직통열차 푯말을 끼우고 운행하기도 했다.
  12. 이전에는 지하철 직통 완행이 한강철교 A, B선 포함하여 경부 2선을 사용하였다. 기록상으로는 일제강점기때 한강철교 C선이 사용을 개시하고 C선이 경부선 단독으로 분리되면서 사실상 영등포까지 경부선과 경인선이 분리된... 즉, 이미 그 시점부터 당시의 경부선이 경부 1선, 경인선이 경부 2선으로 분리되었을 것으로 추정.
  13. 경부 3선은 서울-구로 3복선화 공사의 일환으로 준공된 한강철교 D선의 사용개시와 같이 개통되고 경부선 계통 포함하여 지하철 직통 완행은 전부 경부 3선을 사용하게 되었다.
  14. 이는 용산역 북단의 과선교와 관련이 있는데 본래 서울역을 출발한 경원선이 용산역 남단에서 분기되기전 선로의 위치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바꾸기 위해 개설된... 즉, 이 과선교를 통해 경원선은 서울역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5. 15.0 15.1 이때는 지금과 달리 경인선의 역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당장 경인 급행 정차역이 오류동역을 제외하면 수도권전철 개업 당시의 역 목록과 일치할 정도
  16. 만약 이 변경이 가시화될 경우 반드시 이 구간만 일시적으로 선로별 2복선을 적용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17. 이는 경부 2선이 사용하는 한강철교 A, B선의 한강북단측 구조와 관련이 있다. 북단은 무슨 이유인지 교각만 복선규격에 단선 교량을 병설하는 식으로 복선화되었으며 그 복선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B선에 곡선이 생겨 속도제한이 걸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보통 이런 경우 아예 새로 건설하지 않는 한 대개 단선 교량만 병설하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현재로서는 불명.
  18. 특히 전통적인 철교인 무도상 강교에 궤도의 주행레일 내측 혹은 외측에 탈선방지 레일이 존재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 구간의 속도제한은 엄격한 편이다.
  19. 일본에서는 이를 '운전계통'으로 구분하며 JR의 경우 노선 명칭이 철도요람상의 기준 외에도 '운전계통'으로의 기준도 존재한다.
  20. 거기에 운행하는 차량도 급행은 교류전용, 서울지하철 1호선 직통 완행은 교직 양용으로 서로 다르다.
  21. 거기에 현재도 변함없이 인천에서 수도권 북부 방면으로의 경로는 경인급행선-경부2선-용산삼각선-경원선(경의중앙선)이 최단거리다.
  22. 반대로 중앙선발 벌크시멘트 화물도 인천방면은 경인선이다.
  23. 요즘에는 고가하부공간을 활용하는 사례도 많은 편이다.
일반주
  1. “十八日行”. 황성신문. 1899년 9월 16일. 2021년 1월 25일에 확인함. 
  2. “汽車運行”. 황성신문. 1899년 9월 19일. 2021년 1월 25일에 확인함. 
  3. 京仁鐵道合資會社 (1900년 7월 4일). “滊車全通”. 황성신문. 2021년 1월 25일에 확인함. 
  4. “京仁鐵道開業式”. 황성신문. 1900년 11월 13일. 2021년 1월 25일에 확인함. 
  5. 이용상 외 (2013). 《한국 철도의 역사와 발전 II》. 서울: BG북갤러리. 341쪽. ISBN 9788964950531. 
  6. 6.0 6.1 鮮交會 (2017) [1986]. 《조선교통사 2》. 번역 최영수; 서홍. 서울: BG북갤러리. 60쪽. ISBN 9788964951033. 
  7. 최성연 (1959). 《개항과 양관역정》. 인천: 경기문화사. 125쪽. 京仁線은 工事費와 工事期間關係로 橋梁 및 路盤 工事가 거칠었고 또 不必要한 曲線이 많었으므로 總額 525,230圓의 豫算으로 1907年부터 1909年 3月까지의 滿二年間 改良工事를 施行한 結果, 1哩假量을 短縮할 수 있었으며 前牛角驛과 現 仁川傳道舘 東北間을 迂廻하던 舊線을 道禾洞으로부터 直線으로 是正 하였으며, 杻峴驛(東仁川驛)을 채미전 거리로부터 現位置로 옮기게 되었는데, 從前에는 旅客만을 中間取扱하기 위한 單線의 簡易驛 이던것을 普通驛으로 昇格 시켰으며, 오늘과 大差 없는 構內線을 敷設하였고, 
  8. 鮮交會 (2017) [1986]. 《조선교통사 2》. 번역 최영수; 서홍. 서울: BG북갤러리. 39쪽. ISBN 9788964951033. 
  9. 경인간복선개통, 《동아일보》, 1965.09.18.
  10. “화륜거 왕ᄅᆡ 시간”. 독립신문. 1899년 9월 16일. 2021년 1월 25일에 확인함. 
  11. 손길신 (2015년 10월). “최초의 경인철도 집중탐구” (PDF). 《철도저널》 (한국철도학회) 18 (5): 13. 2019년 8월 31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9월 1일에 확인함. 
  12. “경인간 쳘도 규칙”. 독립신문. 1899년 9월 16일. 2021년 1월 25일에 확인함. 
  13. 배은선 (2019). 《기차가 온다》. 서울: 지성사. 103쪽. ISBN 9788978894180. 
  14. “京仁銕道滊車時間改正”. 황성신문. 1903년 6월 25일. 2021년 1월 25일에 확인함. 
  15. “京仁鐵道滊車時間改正廣告中”. 황성신문. 1903년 7월 2일. 2021년 1월 25일에 확인함. 
  16. 8.15특집 지하철 · 전철시대 개막, 《경향신문》, 1974.08.15.
  17. 서울시 교통국, 2002년 수도권 OD
  18. 18.0 18.1 18.2 조사부장 (2017년 9월 2일). “경인선 완급 절체설.”. 《조사부장 집무실》. 2022년 7월 26일에 확인함. 
  19. 사업비 대안 부딪친 '경인선 지하화' 난항 인천일보, 2016년 10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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